아동문학의 미학
아동문학(兒童文學, Children's literature)은 어린이와 어린이의 마음(동심)을 갖고 있는 성인을 대상으로 한 문학으로, 어린이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거나 교훈적인 내용을 소재로 하며, 대체로 평이한 문장에 그림이 곁들여진 작품을 말합니다. 아동문학은 소위 주류문학이라고 불리우는 성인 문학, 일반문학과 다른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봅니다. 만약, 아동문학이 이들 주류 문학의 일부 이거나 같은 것이면, 일반적인 문학비평에서 나오는 분석 도구들을 아동문학에도 접근하여 평가 되어지고 있습니다. 아동문학 작가들은 아동기가 어떤 것인지가 아닌, 아동기는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동문학이 하나의 예술로 서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지만, 강력한 교육학적 취지를 전제하게 합니다. 아동문학의 맥락에서 ‘일반’ 혹은 ‘성인’ 문학으로 세분화하지 않고 우리가 통상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과 구별하는 기준으로 아동문학의 문학-교육의 혼합으로 사용하는 것은 매우 불합리합니다. 사실상 모든 문학을 예술 형식과 교육적 수단으로 혹은 이데올로기적인 수단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더 합당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아동문학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이념적이거나 교육적 의도가 아동문학에서 더 명시적인 것 같지만 이는 정도의 문제이지 본질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마리아 니콜라예바, 아동문학의 미학적 접근, 교문사, 2009, p1-
역사적 당위성
아동문학은 인류역사를 볼 때 최근의 현상물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아동기가 인정되기 이전에는 존재가 불가능했다. 필립 아리에의 <아동의 세기>, 피터 코베니의 <아동기이 이미지>, 로이드 드 마우스의 <아동기이 역사>같은 연구에서 볼 수 있듯이, 서구의 계몽기와 후기 낭만주의 시기인 18세기 이전에는 아동기가 없었다. 그래서 비록 이야기가 고대부터 교육목적으로 사용되어 왔다고 하더라도 18세기 말이나 19세기 초까지는 명백히 분리된 범주로서의 아동문학의 출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동문학이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이미 존재했으며 중세기에도 있었다고 주장하는 길리안 아담스 같은 일부 학자들처럼 누구나 이 견해를 받아들이는것은 아니나, 이런것들은 어디까지 정의상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아동문학을 의도적으로 특수한 청자만을 향한 텍스트라고 협소한 정의로 본다면, 그 특수한 청자인 어린이를 인정하기 이전 시대의 문학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리아 니콜라예바, 아동문학의 미학적 접근, 교문사, 2009, p2-
사회적 요인
아동문학이 지금처럼 발달해 온 데에는 특수한 방식에 영향을 준 여타의 요인들이 존재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 사회에서 아동문학이 맡은 역할입니다. 의심할 것 없이 아동문학은 교육적 목적으로 많이 이용되어 왔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아동문학의 본질이 교육에 있다는 주장까지 펼쳤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주류 문학도 교육적 목적을 위해 널리 사용되어 왔었기 때문입니다. 아동문학은 처음부터 청중을 교육하고 지도하기 위해 사용되어 왔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 일부 학자들은 아동문학을 문학계 안으로 들여놓는 것을 거부하면서 교육적 상황에서만 논의되고 연구되어야 한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아동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도구로 전락시키는 것은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또한 교육적 측면이 아동문학 미학의 일부라고 주장되는 정도도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아동문학이 담당한 특별한 사회적 역할의 결과는 무엇일까? 아동문학이 단순하고, 인물보다는 행위 중심적이고, 낙관적이며 행복한 결말을 갖고, 교훈적이고 반복적이라는 주장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저명한 아동작가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묘사 중 어떤 것도 아동문학의 정의에 맞춰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 니콜라예바, 아동문학의 미학적 접근, 교문사, 2009, 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