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페미니즘에서의 자연
에코페미니즘에서의 자연은 여성과의 동일시이자 하나의 커다란 생명력을 가진 힘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언제나 이롭고 감싸주는 존재만이 아닌, 유동하고 변화하는 격동적인 에너지, 잉태하고 낳고 기르는 생명력을 가진 하나의 유기적인 힘이다. 여기에 에코코페미니즘이 가진 영적에 대한 관심은 나아가 급진적 에코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는 남성적인 일신 대신 대지모신 가이아를 부활시키자는 주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이런 유기적이고 주체적인 하나의 존재로 보아야 할 자연을 그저 개발이나 착취의 대상으로만 보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관찰의 대상으로 한정하며, 공짜 자원으로 인식하는 서구 백인 남성의 가부장적 자본주의는 같은 방식으로 여성의 육체도 착취해왔고, 여성 환경론자들은 그 밀접성을 인지한 것이다. 가부장적 자본주의에서는 여성 자체를 태아를 생산하는 원자재로, 여성의 가사 노동 등은 GNP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공짜로 쓸 수 있는 노동력 등으로 인식한다. 제3세계의 경제도 같은 방식으로 인식하며, 자연 역시 수력, 화력 에너지, 목재, 석유 등으로 해체하여 원자재로만 여기고 착취해왔다.
가부장적
모두가 먹기 위한 값진 노동을 하고 순수하게 자연에서 난 것을 먹는, 이렇게 자연과 유기적으로 상생하는 그런 공동체를 에코페미니즘에서는 자급적 관점에서 이상적인 모델로 본다. 그러나 강대한 자본주의 국가는 이들의 땅에서 난 목재나 광석, 노동 등을 싼 값에 가져가고, 이들은 이들을 먹이던 어머니인 자연을 원자재로 분해하여 판 대가, 소위 문명이라 불리는 자본주의의 경제를 받아들인 대라고 황폐해져가는 자연과 건강, 그리고 서구 자본에 계속해서 유린당할 빌미만이 남았다.
처음에는 이들도 무역 경제를 개방하고 자신들에게 풍부했던 자연을 쪼개어 팔면 그 돈으로 더 나은 경제를 이룩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출발선이 다르고, 시장의 크기가 다르고, 자본의 규모가 다른 거대 자본 시장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게다가 전 세계 에너지 생산량의 3/4을, 미국, 유럽, 일본 인구가 소비하고 있으므로 어차피 다른 세계인구가 자국 개발을 위해 쓸 에너지는 처음부터 남아 있지도 않았던 것이다.
성차별
근대는 신에게서 인간 중심으로 넘어온 시대였으며 인간도 신이 가진 절대 보편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믿어지던 때였다. 인간이 가진 그런 가치는 ‘이성’이라는 것이었으며, 이성적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한 데카르트의 시도는 근대성의 상징이다. 과학이란 것이 이 근대의 산물이며, 방법론에서부터 이성적 주체가 객관적으로 대상을 관찰하고 탐구하는 행위로 보편적 가치와 진리를 탐구하는 행위가 기반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남성이 주도하고 이끌어온 과학은 다분히 남성적인 영역이었다. 근대에서 이성이란 남성의 상징이며 이분법적으로 신, 남성, 이성의 반대에는 여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에코페미니즘에서는 이 객관적이라고 믿어지는 지식을 경계한다. 예를 들어 의술에서는 인간의 육체를 무기력한 간 부의 기능만으로만 ‘객관적으로’ 파악한다. 그것은 산부인과에서도 잘 드러난다. 의료 기술이 없었을 때의 임신한 여성은 산파의 도움으로 아기를 낳는 주체였으니, 산부인과의 의료 기술이 발달한 뒤에는 어머니는 출산이라는 행위에서 배제되게 되었고, 이것은 지식을 가진 의사(전에는 대체로 남자)의 주도 아래, 그가 가진 의료 기술로 태아를 생산하는 행위로 변모했다.